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78년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오다
- 일상정보/유명 인물
- 2021. 8. 16.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78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오다
제76주년 광복절인 15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서울공항에서는 홍범도 장군 유해를 78년 만에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일제 강정기 봉오동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독립운동가 여천(汝千) 홍범도 장군(1868~1943)은 이제 서야 돌아온 것이다. 문제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는 홍범도 장군의 유해를 직접 맞았다.
앞서 문 대통령은 전날(14일) 홍 장군의 유해 봉환을 위해 황기철 국가보훈처장, 여천 홍범도 장군 기념사업회 우원식 이사장과 국민대표 자격의 배우 조진웅 씨를 카자흐스탄에 특사로 파견, 특사단은 14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 위치한 홍 장군의 모역에 현지 정부 관계자 및 고려인협회와 추모 및 제례로 유해를 정중히 모신 뒤 이날(15일) 광복절 오전에 대한민국 군 특별수송기(KC-330)를 이용해 이를 본국으로 봉송하였다.
이어 홍 장군 유해를 태운 특별수송기는 공군 전투기 6대의 엄호 비행을 받으면서 이날 오후 7시30분쯤 서울공항에 도착, 청와대 측은 "대한민국 공군이 운용하는 전투기종을 모두 투입해 1921년 연해주 이주 후 100년 만에 고국으로 돌아오는 홍범도 장군을 최고의 예우로 맞이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홍 장군은 유해 봉환은 오는 16일~17일 카심조먀르트 토카예프 카자흐스탄 대통령의 국빈 방한을 계기로 성사, 지난 2019년 4월 문 대통령의 카자흐스탄 국빈 방문 당시 합의되었든 약속이 약 2년 만에 결실을 맺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에서 태어난 홍 장군은 일제 치하에서 의병투쟁에 몸을 던진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이며 특히 1920년 6월 홍범도, 최진동 등이 이끈 봉오동 전투는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상처를 입힌 독립 전쟁사의 기념비적 전투로 꼽힌다. 홍 장군은 같은 해 10월 청산리 전투에도 참전해 큰 몫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는 일본군에게 '하늘을 나는 장군'이라고 불릴 정도로 두려움의 존재였고 민중에게는 '백두산 호랑이', '축지법을 구사하는 홍범도 장군'이라는 전설이 나돌 만큼 영웅으로 추앙, 1937년 스탈린의 한인 강제이주정책에 따라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강제 이주해 1943년 10월 25일 75세의 일기로 서고 했다. 그 후 78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이에 문 대통령은 진한 해 6월 봉오동 전투 100주년 기념 메시지에서 "이역만리 카자흐스탄에 잠들어 계신 장군의 유해를 조국으로 모셔와 독립운동의 뜻을 기리고 최고의 예우로 보답할 것"이라고 밝힌 바, 이날 홍 장군의 유해는 약속대로 군악대와 의장대의 호위 속에 로더(리프트)를 통해 특별수송기에서 하기됐다. 이후 문 대통령 부부는 서훈 국가안보실장, 유영민 대통령 비서실장, 서욱 국방부 장관, 광복군으로 활동했던 김영관 애국지사 등과 함께 분향, 묵념을 통해 홍 장군의 넋을 기렸다.
한편, 추모를 마친 홍 장군의 유해는 경찰의 호위 하에 대전현충원으로 향했고 홍 장군의 유해는 16일과 17일 양일간 국민 추모기간을 거친 뒤 18일 대전현충원에 안장될 예정이라고 한다.
홍범도 장군은 누구인가?
홍범도 장군은 일제 강정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의병장이다. 1868년 평양 내에 위치한 무열사 앞마당의 양반집에서 머슴살이하던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홍범도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가 출산 후유증으로 사망, 머슴살이하던 아버지마저 그가 9살이 되는 해에 세상을 떠났다. 10대 중반이던 1883년까지 머슴살이를 했고 인생을 바꿔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평양 감영의 나팔수로 입대, 열악했던 군대에 대우에 못 이겨서 금강산에 있는 한 절에 불제자로 출가했다.
이후 평생 교육을 못 받았던 홍범도는 그제야 글을 깨우치면서 우리나라 역사를 배우게 되는데 이순신 장군도 이때 알았다고 하며 비구니였던 아내도 이때 알게 되어 나중에 결혼까지 하게 된다. 1886년 3년 치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를 말다툼 끝에 살해, 강원도 북부 산악 지대에서 사슴, 노루, 멧돼지를 사냥하면서 1895년 을미의병 발생 시기에 10년 동안 평범한 사냥꾼으로 생활했다고 한다.
총을 잘 쏘기로 유명하여 일대 포수들에게 지지를 얻어 '포계'라는 포수 권익 단체를 만들어 대장을 하게 된다.
그 후 1895년 을미의병 발생 김수협과 의병을 일으켜 일제의 총 포기 화류 일제 단속법이 발령됐기 때문 사냥을 그만두었을 때도 '이 총으로 짐승이 아닌 왜놈들을 사냥하겠다"라고 다짐 일본군과 맞서 싸우게 된다. 당시 의병은 14명으로 전해지며 대부분 함께 사냥을 하던 산포수 들이라고 한다. 또한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시점에 최대 600명~700명으로 생각되는 의병대를 이끌고 주로 함경도와 강원도 북부를 무대로 유격전을 벌였다. 1910년 결국 대한 제국이 일본에 병합, 1919년 10월 혜산진 일대에서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인 홍범도는 1920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의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 북로 군 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 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된다. 많은 활약 끝에 1941년 6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이후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돕는 활동을 했고 1942년 4월 홍범도가 몸담고 있던 조선극장이 우스또베로 옮겨간 이후에는 정미소 노동자로 일하다가 1943년 10월 25일 노환으로 별세하게 된다.
홍범도 생애 요약
-1868년 머슴살이 아버지에게서 태어남
-1883년 평양 감영의 나팔수 입대, 이후 금강산에 절에 불제자로 출가
-1883년 임금을 체불한 고용주 살해, 10년간 사냥꾼으로 생활
-1895년 을미의병 직후 의병으로 활동 시작
-1905년 대한제국의 을사늑약 체결, 600명~700명을 거느린 의병대를 이끌었음
-1908년 일제에 붙잡힌 아내 이옥구가 모진 고문으로 옥사, 1달 후 장남 정평 배기 전투에서 사망,
차남 아버지와 연해주로 의병활동을 하다 결핵으로 병사
-1910년 결국 대한 제국이 일본에 병합
-1911년 연해주로 망명,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점으로 독립운동 단체와 연계해서 수시로 월경해 접경 지대의
친일파 및 일본 군경을 괴롭히는 유격전을 수행
-1919년 혜산진 일대에서 유격전 성과로 지명도를 높임, 봉오동 일대에서 무장 독립운동 단체들이 연합해서
결성한 대한 북로 군 독부 예하 북로 제1군 사령 부장(부사령관)으로 선출
-1920년 김좌진, 홍범도의 충돌로 부득이하게 홍범도를 포함한 독립군 세력은 소련 영내로 탈출
-1921년 연해주 및 시베리아로 후퇴한 독립군은 결국 소련의 지원을 받아 자유시로 이동
-1922년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의 주최로 열린 극동 민족대회 참석
-1923년 연해주 남부에서 한인 콜호즈의 지도자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이뤄진 고려인 강제 이주로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
-1941년 제2차 세계대전 발발한 이후 물자를 아껴 전선의 병사들을 도는데 선전 활동
-1943년 노환으로 별세
마지막으로 올해 홍범도 장군 유해 봉환, 78년 만에 고국 품으로 돌아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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